
솔직히 저는 가민을 '러닝하는 사람들의 물건'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직접 가민 워치를 쓰면서도 그 생각이 바뀌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CES 2025에서 공개된 가민의 행보를 살펴보니, 제가 가민을 너무 좁게 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러닝 워치 브랜드가 골프 시뮬레이터를 들고 나왔고, 그게 생각보다 진지했습니다.
가민이 골프장까지 온 이유: GPS 기술의 확장
가민이 처음부터 스포츠 워치 회사였던 건 아닙니다. 이 브랜드의 출발점은 GPS 항법 기술입니다. 여기서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란 위성 신호를 수신해 지상에서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시스템으로, 경비행기 조종사나 어부들이 가민 장비를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이유가 바로 이 기술의 신뢰성 때문입니다. 실제로 CES 2025에서 가민 부스가 자동차·모빌리티 관련 기업들이 몰려 있는 LVCC 웨스트홀에 자리 잡은 것도 이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도 가민 워치를 처음 샀을 때 가격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러닝용으로 구입했는데 결코 싸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써보니 그 가격이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특히 달리기 코스가 지도 위에 그대로 기록되고, 그 데이터가 누적되면서 페이스, 케이던스(Cadence, 분당 발걸음 수), VO2 Max(최대 산소 섭취량, 유산소 능력을 수치로 나타낸 지표) 같은 수치가 시각화되는 방식이 다른 제품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데이터를 스포츠에 접목시키는 능력만큼은 가민이 독보적이라는 걸 직접 경험으로 확인했습니다.
이번에 CES에서 공개된 어프로치 R50은 그 GPS 기술이 골프로 넘어온 결과물입니다. 전 세계 43,000개 이상의 골프 코스 데이터가 내장돼 있으며, 내부에 탑재된 초고속 카메라로 볼 스피드(Ball Speed), 런치 앵글(Launch Angle, 공이 타격 후 날아가는 각도), 스핀 레이트(Spin Rate, 공의 회전 속도), 스핀 액시스(Spin Axis, 공의 회전 축) 같은 수치를 실시간으로 측정합니다. 이 지표들은 기존 골프 시뮬레이터 업계에서도 핵심으로 다루는 데이터들입니다.
어프로치 R50의 스펙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내장 골프 코스: 43,000개 이상
- 연속 사용 시간: 약 4시간 (C타입 충전 지원, 차량 연결 시 장시간 사용 가능)
- 출력 연결: HDMI 포트 지원으로 외부 대형 스크린 연결 가능
- 측정 항목: 볼 스피드, 런치 앵글, 스핀 레이트, 스핀 액시스
- 가격: 약 5,000달러(한화 약 700만 원대)
- 좌우 타자 전환 지원
골프존과 비교하면 어떨까: 가성비와 보급화 가능성
국내 스크린 골프 시장은 골프존과 카카오VX의 프렌즈스크린이 양분하고 있습니다. 이 두 브랜드의 실내 골프 설비를 개인이 집에 갖추려면 장비 구매비와 설치 공간 확보 비용을 합산했을 때 수천만 원을 훌쩍 넘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내 스크린 골프 시장 규모는 2023년 기준 약 1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며, 그만큼 하드웨어 비용도 높게 형성되어 있습니다(출처: 한국골프산업연구소).
그에 비해 어프로치 R50은 빔 프로젝터 하나, 하얀 벽면 하나, 그리고 기기 본체만 있으면 작동합니다. 상단 센서를 별도로 설치할 필요가 없고, 외부 스크린 없이도 기기 자체 화면으로 연습이 가능합니다. 5,000달러라는 가격이 처음엔 부담스럽게 느껴졌는데, 골프를 자주 치는 분들 입장에서는 필드 라운드 비용이 한 번에 수십만 원씩 나가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장기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제가 주목한 부분은 기술보다 방향성입니다. 가민은 이번 CES에서 피닉스 8 프로(Fenix 8 Pro) 워치에 위성 신호 기반의 SOS 송출 기능인 인리치(inReach)를 통합했고, 가민 커넥트(Garmin Connect) 앱에는 음식 사진을 찍으면 칼로리와 영양 성분을 자동으로 분석해 주는 기능을 추가했습니다. 여기서 바디 배터리(Body Battery)란 수면, 심박수 변이도(HRV), 활동량 등을 종합해 사용자의 현재 에너지 수준을 0~100으로 수치화한 가민의 독자적인 지표입니다. 이 음식 데이터가 바디 배터리와 연동되면,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건강 관리의 변수로 편입되는 셈입니다.
웨어러블 시장에서 애플워치 울트라나 갤럭시 워치 울트라가 스포츠 기능을 강화하며 가민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한 건 사실입니다. 글로벌 웨어러블 기기 시장은 2024년 기준 약 950억 달러 규모로, 2030년까지 연평균 14%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출처: Grand View Research). 이런 경쟁 환경에서 가민이 선택한 전략은 '더 스포티한 기기'가 아니라 '더 깊은 데이터 플랫폼'으로의 전환입니다. 스포츠 마니아만이 아니라, 운동을 싫어하지만 건강은 챙기고 싶은 사람들까지 품겠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그쪽에 해당합니다. 러닝은 좋아하지만 식단 관리는 늘 흐지부지됩니다. 그런데 가민 커넥트에서 음식을 사진 한 장으로 기록할 수 있고, 그 데이터가 운동 데이터와 연결된다면 귀찮음이라는 장벽이 상당히 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경험상 건강 관리 앱의 가장 큰 적은 기능 부족이 아니라 '입력하기 귀찮음'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시장에서 가민의 골프 시뮬레이터가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골프존이 이미 워낙 깊게 자리 잡은 시장이고, 소비자들의 브랜드 신뢰도도 확고합니다. 하지만 GPS 정확도라는 가민 고유의 강점을 골프에 이식했다는 점, 그리고 운반과 설치가 쉬운 포터블 설계라는 점은 분명히 차별화된 접근입니다.
가민이 단순히 제품 하나를 더 만든 게 아니라, 데이터로 스포츠 전반을 연결하는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강해집니다. 러닝부터 골프, 식단까지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관리된다면 이건 단순한 워치 브랜드가 아닙니다. 앞으로 나올 가민의 행보가 이전보다 훨씬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가민 제품을 이미 쓰고 계신 분이라면, 한 번쯤 가민 커넥트 앱을 다시 들여다볼 타이밍이 된 것 같습니다.